복지뉴스

욕쟁이 할아버지와 만세 할머니

삼척시사회복지협의회 0 6,994 2013.01.22 11:13

나는 춤을 통해 즐거움과 행복을 전하는 무용 강사다. 나는 무용을 통해서 삶의 많은 어려움을 극복했고 춤을 통해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으며 지금도 여전히 이를 통해 감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나보다 더한 고난과 슬픔, 어려움과 역경을 지닌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를 전하고 싶었다. 때문에 대학시절 고민의 여지없이 전공으로 무용교육 지도자 과정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학부 졸업학기에 1년여 동안 노인을 대상으로 한 무용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 계기는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노인인구는 급증하고 있기에 노후의 삶이 쓸쓸함과 허전함 혹은 우울함 등의 연속이 되지 않도록 춤을 통해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여러 사이트 게시판에 본 프로그램개발의 목적과 필요성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과 기대효과를 알리고 마지막으로 실제 도움을 원하는 어르신이 계신 장소에서 자원봉사로 본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뜻을 알렸다.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한 사회복지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본 기관은 노인보호시설이며 15여명의 어르신들이 무료하게 토요일을 보내고 계신다기에 흔쾌히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첫 자원봉사 활동이 시작되었다. 처음 기관을 방문하게 되던 날, 아직 자원봉사에 대한 경험도 교육자로써 어떤 활동을 해본 경력도 없는데다가 어르신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은 적도 없었기에 긴장은 배가 되었다. 게다가 기관장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언급해 주시지 않았었다. 그 것은 어르신의 대다수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것과 50중반에서 90후반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 계시다는 것이었다. 기관에 도착해 이 사실을 전해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르신들이 계시다는 이층 복도를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꿈꿔왔던 대로 춤을 통해 어르신들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굳게 닫힌 문에 벨을 누르자 한 사회복지사가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15여명의 어르신들을 처음 만났다. 

나는 생글 웃으며 인사를 하고 소개를 했지만 어르신들의 반응은 무서우리만치 냉랭했다. 그 때였다. 소파에 앉아 계시던 한 할아버지가 대뜸 나에게 알아듣지 못할 만큼 거칠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회복지사는 내가 놀란 것을 알아챘는지 할아버지를 욕쟁이 할아버지라 칭하시며 놀라지 말라 하셨다. 그 말에 안심을 하려는 찰나 또 다시 내 가슴이 마구 뛰었다. 이번엔 한 할머니께서 우렁차게 만세를 외치셨기 때문이다. 수업을 하기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 후회를 했다. 괜한 짓을 한 것이란 생각에 참으로 많이 후회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왕 온 것이니 오늘만 버티고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프로그램의 첫 차시 움직임 수업을 시작했다. 내용은 [늘어나는 몸의 움직임]이란 주제로 음악에 맞춰 신체를 부분별로 늘려보는 일종의 스트레칭 수업이었다. 나는 차분히 어르신들이 따라 하실 수 있게 유도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웠다. 내가 인사를 할 때나 소개를 할 때는 전혀 반응이 없던 혹은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던 어르신들이 내 몸짓을 아주 유심히 지켜보시더니 이내 하나하나 따라해 보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놀라운 순간이었다. 내가 옆으로 기울이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옆으로 기울이시고 음악에 취해 후~숨을 내쉬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너무나 눈물겹게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첫 활동을 마치고 돌아갈 채비를 했지만 여전히 다시는 안 오리란 단단한 후회를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나가기 위해 문을 열려는 순간 어느새 욕쟁이 할아버지가 내 뒤를 따라오셨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나긋한 목소리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단 한마디를 제하고 그러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말이 일본어였기 때문이며 알아들은 한마디는 이러했다. “이쁜아, 이쁜아, 또 올 거지…….” 의문답지 않게 말끝이 흐려지셨다.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왜였을까. 나도 어른들이 말하는 참을성도 끈기도 없는 영락없이 요즘아이들이였기에 약속이고 뭐고 다신 안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한마디를 듣는 순간 못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눈물이 흘렀던 것일 게다. 그렇게 울다보니 울음소리에 놀랐는지 사회복지사가 달려왔다. 나를 다독이더니 욕쟁이 할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본인도 처음 본다며 감사인사를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어린 나에게 허리 숙여 몇 번이고 인사를 하는데도 그 인사에 허리 한 번 숙이지 못한 채 울기만 했다. 돌아오는 내내 정말이지 심장이 미어터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토요일마다 어르신들과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물론 상당수가 치매를 앓고 계셔서 나는 뵐 때마다 새로운 선생님으로 둔갑되어 있었지만 놀랍게도 어르신들의 몸이 춤을 기억하고 있고 춤을 통해 동작을 만들어 내며 나를 기억해 주고 있었다. 욕쟁이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은 날엔 이쁜이라고, 그렇지 못한 날엔 욕으로 나를 불러주셨다. 

한 날은 군밤타령의 가사를 몸으로 표현하는 내용으로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바람이 분다고 하면 두 팔을 흔들고 연평바다라 하면 물결을 그리 듯 두 팔을 아래에서 휘저었다. 또한 얼싸 좋다하면 박수를 치면서 참으로 즐겁게 수업을 했었다. 그 날 만세를 외치던 95세 할머니가 고맙다면서 자기도 노래를 가르쳐 준다 하셨다. 나는 만세 할머니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산에 산에는 산딸기 

밭에 밭에는 밭매기 

고향 고향 내 고향 

내 고향 산에는 산딸기 

놀라웠다. 95세 치매 어르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의 가사와 음색, 음율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만세 할머니는 연세 탓인지 종종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시곤 했기에 이 노래가 더욱이 잊어지지 않는다. 만세 할머니에게 노래를 배우는 어느 틈에 욕쟁이 할아버지 역시 옆에서 흥얼거리고 계셨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지켜보던 사회복지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도 어김없이 감동을 느끼고 돌아가려는 순간 사회복지사가 불러 세웠다. 경험해 보지 못한 어르신들의 젊었을 때의 시간들……. 

욕쟁이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본인들에게서 부모를 잃었고 오래토록 일본 순사로 지냈으며 부인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 그리고 만세 할머니는 일본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는 것 등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 아픔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지금에 이르러서도 어르신들을 괴롭히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또 다시 울음보가 터져버렸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욕쟁이 할아버지의 성(性)적인 욕도 만세할머니의 소리침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슬프고 아팠으며 기쁘게 해드리고만 싶었다. 

봉사활동의 마지막 날은 처음 만난 날처럼 잊어지지가 않는다. 그날따라 욕쟁이 할아버지는 기관에 계시지 않았고 만세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두 분에게 많은 정을 느껴서인지 많이 아쉬웠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사회복지사가 그동안 너무 감사했다며 무언가를 전해주었다. 기관에서 평일에 이루어지는 미술치료시간에 어르신들이 그린 그림이었다. 건네받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아 낸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그림은 욕쟁이 할아버지의 그림이었다. 눈, 코, 입이 없는 못생긴 사람이었는데, 분명한 것은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할아버지 이름 석 자와 내 이름 석 자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첫 날 알아들은 한마디가 적혀있었다. 이쁜아, 또 올 거지. 

이 선물을 이유로 나는 자원봉사활동 이후에도 시간이 되면 토요일에 기관을 찾았지만 할아버지는 마지막 날 보지 못한 이후로 기관에 오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만세 할머니 역시 볼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연세가 많으셔서 이 생(生)이 아는 저 생(生)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애 첫 자원봉사를 미치도록 아프게 미치도록 감동스럽게 마쳤다. 자원한 것은 맞지만 절대 봉사일 수 없는 순간들이었다. 어르신들은 되레 나에게 삶을 대해야 하는 바른 태도를 가르쳐 주셨고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함을 일깨워 주셨다. 또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큰 포부를 가질 수 있는 넓은 마음가짐을 주셨으며 아픔과 시련도 담대히 극복해 낼 수 있는 용기를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무용을 전하는 교육자로써 춤을 통해 기쁨과 즐거움을 전하고 감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을 쓰며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또 다시 가슴이 쪼그라들고 눈물샘이 고장 나 버렸기에 다시금 기관을 찾아갈 생각이다. 끝으로, 

욕쟁이 할아버지, 만세 할머니 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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